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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주의 대표 상품 가라유키상(唐行きさん).


오늘날 발달된 일본의 AV나 유흥 산업의 이면에는 메이지시대부터 계속된 국가관리 매춘의 역사가 있다. 여성은 그러한 국가적 폭력 아래에서 강제매춘과 성폭력을 강요당했다. 



탈아론을 집필한 메이지 일본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를 적극 지지하며 추천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공공연하게 매춘부를 해외에 팔아 무기를 구입하자고 주장했다.


카라유키상(唐行きさん)은 이러한  일본의 역사적 배경아래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매매춘을 목적으로 해외로 건너간 일본 여성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다. 


 카라유키는 중국, 홍콩, 필리핀, 미얀마,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싱가폴 말레이시아등에 퍼지며 멀리는 시베리아나 하와이나 북미, 마다가스카르 등에까지 보내진 사례도 있다. 


 이들중에는 어린 소녀들이 많았다. 가난한 부모가 인신매매단에 팔아넘기면 당시 메이지 일본 당국은 뇌물을 받고 이를 묵인했다.  그녀들은 낭자군(娘子軍)이라 일컬어지며 메이지 일본 외화획득의 첨병 역할을 수행했다.


 일본에는 이런 여자들을 대대적으로 모집해 송출하는 기업이나 인신매매 장사꾼들(嬪夫, ピンプ)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들이 후일, 한국등 일제에 희생된 국가의 수많은 여성들을 위안부로 내몬 참상의 원흉이 되었다.



여성을 성적 도구로 바라보는 일본제국주의는 이들을 일본 제국의 상품으로서 철저하게 이용하고 필요가 없어지면 가차없이 버려졌다.


 일본의 우익이 납치등의 인신매매 범죄로 이루어진 종군위안부 피해자를 자발적 매춘으로 폄훼하는 폐륜적 주장의 밑바탕에는 이러한 일본제국 성향이 있었던 것이다.


 카라유키상이 현지에서 송금하는 외화 금액이 커지자 나중에는 일본정부가 직접 나서 대대적으로 카라유키를 모집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상 그녀들은 일본정무가 직간접적으로 관리하는 사실상의 해외 공창이였다. 


 나가사키의 시마바라 반도나 구마모토의 아마쿠사 제도의 가난한 농어민의 딸이였던 카라유키상은 대부분 일본에 귀국해서도 국가의 수치가 되어 끔찍한 차별과 천대를 받거나 사실을 숨기며 살았고 일부는 평생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해외에서 여생을 마감했다.